2008년 09월 03일
마음대로 해보기,

한동안 너무 듣기 싫었던 말 중에 하나가, "무슨 일이든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었다. 그 말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데, 당시 내게는,"너 하나만 참으면 돼.", "여자가 참아야지.", 등으로 나의 희생을 강요하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어떤 상황에 이끌려 다니거나, 그 틀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주체가 되고, 그 안에서 스스로 통제력을 발휘하고 나니, 어렵게만 여겨졌던 문제들이 너무나 쉽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하였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과 결정권이 나에게 있다는 것, 내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것이 내게 가장 필요했던 것이다.
한동안 나는 반바지도, 화려한 옷도 못 입었다. 불편해서라기 보다, 다른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였다. 아기 엄마인데, 시어르신들 계신데, 별로 날씬하지 않은데..여러가지 이유도 많았다. 나도 모르게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은연중에 학습된 '틀'에 갇혀 있었다. 그 '틀'이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아서 갑갑하고 숨이 막혔다. 그런데 정작 그 틀에서 벗어날 용기나, 자신감이 부족했다.
어느날, 아이에게 제대로 멋진 화구를 사줘야지....하고 벼르는 동안 아무것도 못 사고 시간만 흐르길래, 무작정 집 앞 문방구에 가서 크레용과 스케치북을 사왔다. 그리고 아직 크레용을 보면 먹으려고 하는 아이에게 시범을 보여준다며 선을 슥슥 그었다. 그 순간, 어찌나 가슴이 뻥 뚫리면서 시원하던지. 그림에 대한 동경이 있어서 미술학원도 다니고, 스케치 기법에 관한 책도 여러권 샀지만, 소질이 없는 것 같아 어째 늘 자신감이 없었는데..그래서 스케치북을 펴도 늘 한심한 그림만 그리는 내가 못마땅해서 아예 관두고 있던 차에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이다. 바로 내맘대로 선긋기!! 이리저리 의미 없는 선을 긋고 역시 다양하지만 별 의미없는 색으로 빈칸을 채워가는데 신기하게도 뭔가 억눌렸던 감정의 퇴적이 개운하게 사라져버렸다.
그 다음엔 형식을 벗어나서 내맘대로 하려는 시도가 조금씩 많아졌다. 가끔은 악보를 안보고 피아노를 치는 것이다. 악보를 읽으려고, 악보대로 정확하게 치려고 낑낑대는게 아니라, 들리는 대로 혹은 내맘대로 작곡해서. 소리가 꼭 완벽하게 조화롭지 않아도 된다. 더불어 내가 좋아하는 곡이지만, 평생 못 칠것 같았던 곡을 하루에 단 4마디씩만 연습하니 처음엔 한심하기만 하던 실력이 아주 조금씩이나마 향상되고 있다.
요리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생협에서 핫케익믹스를 사놓고, 너무 맛이 없어서 냉동실에 방치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내맘대로 해보기를 결심하고 나서 핫케익믹스 뒤에 적힌 레시피 대로가 아닌, 정량 이상의 계란과 우유를 넣어보니, 결국 어쨌든 내 입맛에 맛는 핫케익이 완성된 것이다. 요즘은 늘 해먹던 요리라도 똑같이 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조금씩 창의력을 발휘하게 된다. 제육볶음에 구운고구마를 가루내서 얹는다던지, 콩나물밥에 볶은 김치를 얹는다던지 등등. 사소한 거라도 한번 더 생각해보는게 좋은 자극이 된다.
산책을 할 때도, 요즘은 늘 다니던 길, 들르던 가게에 가지 않는다. 안가던 골목, 새로운 가게에 들러서 낯선 풍경속에 있는 것을 즐긴다. 꼭 멀리 가지 않아도, 다른 길을 찾는 것 만으로도 기분전환이 된다. 어떤 길은 나무가 있고, 어떤 길은 꽃이 있고, 어떤 길은 가게가 있고..같은 동네지만 길은 저마다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다.
옷도 내 마음대로 고쳐본다. 예전에는 특정 상표 선호를 선호하기도 하고, 남과 어느정도 비슷하면 중간 이상은 가는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바람에 나는 아직도 나만의 스타일이 없다. 요즘은 패션도 나를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개성을 드러낸다고, 내면의 야성을 그대로 드러내는게 아니라, 그것을 다듬을 줄 아는 센스가 필요하다. 패션에 있어서 '타고난 감각'도 중요하겠지만 공부하고 노력해서 발전하는 즐거움도 더해야겠다. 니만마커스나 바니스 뉴욕 카탈록을 보면서, 쇼핑은 아웃렛에서 하던 때가 그립다. 수백개의 옷이 걸린 행어에서 손끝으로 캐시미어나 실크를 골라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때의 기준은 상표가 아니라, 순전히 소재와 색감이었다. 재봉틀을 사기위해 조금씩 돈을 모아야겠다.
모든게 양면성이 있고, 균형을 이뤄야 비로소 온전해지는게 신기하다. 좌뇌는 틀을 만들고, 우뇌는 그 틀을 벗어나려고 한다고 한다. 좌뇌의 활성화에 지쳐있던 내게 필요했던 것은 삶의 극적인 변화가 아니라, 작은 발상의 전환이었다. 그것을 통해서 나를 표현하는 방법을 어린아이처럼 다시 배워가고 있다.
'틀'과 '틀 밖', 그것을 넘나드는 유연함이 부족하여 지나치게 욕구를 제한 하거나, 지나치게 긴장을 놓아버리기도 했다. 사소한거라도 내 마음대로 해보면서 반복되는 하루와 습관에 잠시 리듬감을 주기로 하였다.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할 일이 언제나 0순위임을 잊지 말아야한다.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너무 아쉬워하지도 말자. 꿈을 꾸는 것도 계속 되어야 하겠지만, 기복이 없는 일상을 견디는 연습도 해야하는 것이다.
# by | 2008/09/03 00:24 | 러둥(서윤)♡에게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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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힘들겠지만 돈도 벌고 잠시나마 자유를 ^^
그림 좋네요. 저도 그려볼까봐요.
특정 상표를 선호하기고 하고, 남과 어느 정도 비슷하면 중간은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출산을 하고 살이 찌고 나고 보니
내가 참 옷 입는 감각이 없이 안일하게 살았구나. 그냥 백화점에서 사면 중간은 가겠거니 생각하면서..이런 생각했었거든요.
이렇게 생각하고 정리하시는게 참 부러워요.
전 빈티지 + 그런지룩 조끼 입은건데, 만들다만 옷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제가 별로 스타일리쉬하지 않나봐요~ 그냥 예전처럼 미니멀한 컨셉으로 나가야하나..ㅎㅎㅎ